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산 전투 (문단 편집) == 전개 == 926년 4월. 견훤이 보낸 인질 진호(眞虎)가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에 선전포고를 하고[* 고려에 간지 얼마 안 되어 죽었는데 견훤은 이를 고려에서 죽인 것이라고 의심했다.] 웅진으로 진군, 왕건은 여러 성에 명하여 성문을 굳게 걸어닫고 절대 나가 싸우지 말라고 명한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신라 경애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이렇게 전한다. >“견훤이 맹약(盟約)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도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한 번 진격의 북을 울려 위세를 떨치신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왕건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이 넘쳐나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릴 뿐이오.” 결국 견훤은 공세를 포기한다. 그러던 927년 1월, 신라군과 연합한 왕건은 군사를 일으켜 후백제의 용주(지금의 [[예천군]])을 점령하고, 이러한 고려-신라의 공세에 견훤은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지만 왕건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후백제를 공격한다. 그해 3월, 왕건은 운주([[홍성군]])를 공격하고 3일 뒤에는 근품성(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다음 달에는 수군을 시켜 경상도 진주일대를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3개월 뒤인 7월에 김락의 대야성 공격이 성공하면서 후백제는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된다. 즉, '''완벽한 후백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남쪽 나주 일대는 이미 해군 없이는 공략이 불가능한 지역이라는 게 증명된 곳이고, 북쪽의 충청도 지역은 워낙 걸출한 요새들이 많아서 고려&후백제 모두 공세가 어려웠으며, 합천-진주 방면은 그 유명한 대야성이 버티고 있었고, 김천-대구 라인 마저 진출하는 순간 문경&합천 주둔한 고려군 + 신라군의 합동 공세에 두들겨 쳐맞을 게 확실했다. 아니, 포진 자체가 견훤으로 하여금 김천-대구 라인 진출을 강요했다. 다만 일단 적어도 추풍령 일대는 그나마 후백제가 노려볼만한 상황이었다. 신라를 고구려, 백제, 당에게서 지켜주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요새들은 이미 후백제군이 아이러니하게도 통일신라의 유산으로서 물려받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추풍령을 벗어나는 길목들에 방어선을 안배해 놓은 상황이었기에 일단 넘어가더라도 고려&신라의 협공에 샌드백 신세가 되는 건 너무나도 뻔했다. 한편, 상황이 이렇게 되자 눈치가 빠른 후백제 성주들은 고려에 귀부하기 시작한다. 8월에 왕건이 포위망의 핵심이었던 문경의 배산성을 수리하고 강주([[진주]])지역을 순시하자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이 귀부하고 후백제의 성주 여럿이 고려에 투항한 것이다. '''이때 왕건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후삼국 통일이 앞당겨 졌겠지만...''' 견훤은 침착하게 우선 고려가 점령한 근품성을 탈환하고 신라의 고을부([[영천군]])을 점령함으로써 신라로 하여금 고려에게 SOS를 치게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영천이 경주의 코앞에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 왕건은 급히 공훤으로 하여금 1만 군사를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한다. 근데 여기서 주의할점은 포위망을 형성하느라 경주 인근은 텅 비어있었다는 점이다. '''즉, 견훤은 문경과 김천 사이의 약간의 간격을 비집고 들어가 기어코 신라로 치고 들어갔다'''는 것. 오늘날인 [[2023년]]으로 친다면 견훤이 [[서라벌]]([[경주시]])로 쳐들어간 루트가 '''정확하게 [[상주영천고속도로]](301번 고속도로) 루트'''이다. 상주영천고속도로 루트는 상주에서 출발하여 [[경주시]]로 들어가는 '''급소''' 루트인데 견훤은 이 틈을 정확하게 찔러서 상주 - 군위 - 영천 - 경주 루트로 쳐들어가는 [[서라벌 기습]]을 성공시켜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이고 그의 왕비는 직접 [[강간]]했으며 [[서라벌]]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왕건은 우선 공훤에게 본인과 합류할 때까지 섣불리 경주로 진격하지 말라고 명령한 뒤 대야성에 있던 김락으로 하여금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고려&신라군을 인솔하여 대구로 오라고 명령한다.[*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이 급하게 밤낮으로 달린 걸로 나오나 이는 긴박함을 연출하기 위한 고증 희생이다.] 그뒤 왕건 본인은 정예기병 5천(아마도 왕건의 직속 병력의 전부)을 이끌고 남하한다. 견훤의 병력은 고작 5천이었고 고려군은 거의 2~3배에 달했으니 견훤에게 힘든 싸움이 될 것처럼 보였다. 당시 후백제군은 유례없는 역대급 기동전으로 인해 지쳐있었고, 경주가 코앞이긴 했지만 신라군이 병풍이 아니었기에 공훤으로 하여금 바로 견훤을 치게 했다면 일견 유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견훤의 군대는 후백제의 정예였던 반면에 공훤의 군대는 지방에서 차출해서 사실상 손발 안맞는 오합지졸이었고, 신라군의 경우 경주에서 신라군들 대부분의 가족이 후백제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신뢰하기 힘들어졌다. 또 결정적으로, '''견훤 본인부터가 신라 장교 출신이었던데다, 후백제군 자체도 그 뿌리부터가 신라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신라군의 전략과 움직임, 그리고 경상남도 일대의 지리에 대해 훤했다. 물론 이 당시에 신라 왕실에게 충성하는 마지막 남은 신라군이 있긴 했지만 알맹이는 견훤이 거병해서 후백제를 세우는 과정에서 후백제군으로 거진 빠져나간지 이미 20년이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견훤이 당시 61세(!)[* 21세기의 61세와 똑같이 봐서는 안 된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전근대 기준으로는 50대까지만 살아도 나름대로 오래 산 편이고 60대까지 살면 상당히 장수했다고 볼 수 있다. 80대나 90대까지 사는 것은 전근대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장수였던 셈이다. 예전에 60대만 채워도 환갑잔치를 괜히 열었던 것이 아니다.]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뛰어넘는 지휘관이었다. [[http://gil092003.egloos.com/551210|전투과정]]. 마침내 서라벌에서 후퇴하는 견훤의 후백제군과, 천천히 내려와 증원군과 합류한 왕건의 고려군은 공산 일대에서 마주치게 된다. 처음엔 고려군은 후백제의 첨병을 포함한 친백제계 동화사 출신 승병과 잠깐 교전하지만, 첨병들은 고려군을 염탐하고 돌아가버렸으며 승병들은 고려군을 보고 순식간에 흩어져버렸기에 교전은 싱겁게 끝난다. 물론 그 이후 고려군의 정보를 파악해간 후백제군 본대가 들이닥치고, 이를 기다리고 있던 왕건의 고려군 본대가 응수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공산 전투가 시작됐다. 원래대로라면 기병 위주의 기동전을 쉴틈없이 펼쳐왔던 후백제군이 병력의 수나, 체력적으로나 불리했어야 하나, 앞에 언급했듯이 왕건의 정치적 술수로 인해 고려군의 동향을 살피고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을 번 후백제군은, 지쳤을 것이라 생각한 왕건의 예상을 비웃듯 신속한 기동전을 펼쳐 공산에서 매복, 역매복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차례 고려군의 허를 찌르며 승리한다. 공훤의 군대와 합류한데다가 정예병까지 포함되어 숫자 상으로 우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군은, 그 병력의 수를 살리지 못한 채 계속되는 교전 속에서 후백제군에게 순식간에 밀려버리며 기세가 완전히 꺾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후에 패배의 기색이 역력해진 고려군을 견훤이 포위해 섬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후백제군이 포위하게 되자, 고려군은 산속으로 각자 도주하는 것 말고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고, 왕건은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대야성을 상실한 이후의 신라군은 상상 이상으로 무력했고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경주에서의 약탈과 잔학행위를 벌이고도 넉넉히 공산에 포진하는 초월적인 기동력을 선보였다. 왕건 자신도 죽을 위기에 몰렸고 신숭겸과 7명의 장수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